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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천이공행적록 - 풍랑이 거센 바닷길 사행
조회수 1240 등록일 2020. 05. 24 첨부파일
해양유물이야기 MARINE RELIC STORY 죽천이공행적록 풍랑이 거센 바닷길 사행. 아래에 내용이 이어집니다.

제목: 풍파가 몰아치는 바닷길을 따라. 죽천이공행적록은 1624년 인조(재위 1623-1649) 책봉을 위해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죽천 이덕형(1566-1645)의 한글 필사본 사행록이다. 1624년 6월 20일부터 10월 13일까지 사행의 전반부가 주요사건을 중심으로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7월 24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해로사행에 관한 내용이다. 사행은 정사 이덕형 외부사 오숙(1592-1634)과 서장관 홍익한(1586-1637) 삼사가 참여하였고, 이들은 여섯 척의 배와 사백 여 명의 격군이 동원된 대규모 사행선단을 이끌고 평안도 선사포에서 시작하여 중국 산동성 등주로 향하는 총 3,760리의 바닷길을 따라 항해하였다.

1624년 주청사행선단의 해로사행 경로(지도사진이 있다): 7월24일에 선사포, 8월5일에 가도, 8월10일에 사도, 8월11일에 녹도와 황학도, 8월12일에 석성도, 8월13일에 장산도, 8월15일에 광록도, 8월20일에 삼산도와 평도, 8월22일에 여순구와 황성도, 철산취, 타기도, 진주문 그리고 신녀묘, 8월23일에 등주 순이다. 해로사행은 명청교체기인 1621년 후금이 요동반도를 지배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선박기술과 항해술은 험난한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할만큼 발달되었거나 많은 경험이 축척되어있지 못했다. 초창기 해로사행에 참여한 1620년과 1621년, 사신 전원이 익사 당하거나 선박이 침몰되는 해양조난사고가 발생하였고 사절단에게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주청사 이덕형에게 있어서도 풍파가 몰아치는 바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죽천이공행적록 8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해상기후 악화로 위급했던 정황이 잘 묘사되어있다. 역풍이 거세 선박이 파손되고 이에 놀라 경황없이 허둥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단을 이끈 이덕형과 오숙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하늘과 무서운 바다에게 안전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해로사행의 험난한 난관과 위기를 극복하는 최고의 대처방안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달리 해결 방법도 없었는지 군관과 노졸들이 각자의 옷을 벗어 부서진 곳을 메우는 일이 전부였으니 그 참담함이 어떠했을지 짐작된다.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인용시작: 회오리 바람이 급히 일어나 산 같은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배가 물결에 휩쓸려 백 척 물결에 올라갔다가 다시 만 길 못에 떨어지니 어찌할 방책이 없어 하늘에 축원할 뿐이라. 밤이 깊은 후 바람의 기세 더욱 심하여 배 무수히 출몰함에 지탱하지 못하네. 부사가 탄 배가 가장 험한 곳에 정박해서 배 밑 널빤지가 부러져 바닷물이 솟아 역류하여 배 안으로 들어오니 사람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부사가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뱃머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을 지어서 깨끗한 비단에 싸 바다에 넣고는 군관과 노졸로 하여금 옷을 벗어 틈을 막고 또 막게 하더라. 선물할 방물을 배 위로 옮기고 물을 퍼낸 후 바람이 점점 그치니 다행히 살 길을 얻어 날이 밝기 기다려 배를 옮겨 뭍에 닿게 하니 모든 뱃사람이 먼저 내려 장막을 치고 평안히 쉬면서 서로 위로하네. 인용 종료.

한편 같은 날 이덕형이 지은 시를 보면 풍랑으로 사납게 변한 바다에서 선박이 부서지고 중국 선박이 침몰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긴급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강인한 해양정신이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용시작: 만사는 모든 사람 뒤에 하려 배가 가는 것 또한 저절로 느리구나 평생 의리와 천명을 편안히 여기나니 저 하늘이 알아줄 것을 믿노라 인용종료. 해로사행은 바람과 조류의 영향에 따라 다르지만 순항일 경우 대체로 열흘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한 달 여 간의 일정이 걸린 1624년에는 3배가 넘게 소요되었다. 해상기후가 좋지 못해 바닷길 노정에 신중을 기했던 사절단의 노고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또 해로사행 중 총 17차례의 제사를 올렸던 것도 해상안전을 위한 나름의 대응책이었을 것이다. 천비낭랑 즉 마조와 같은 해신보호신이 거친 바다를 평온하게 해줄 거라는 절대적인 믿음의 소산이다. 해로사행을 기록화로 제작한 항해조천도에서 여섯 척의 배가 산만큼이나 큰 파도를 넘고 넘어 항해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종이에 채색되어 있는 항해조천도 그림 복제품 사진(소유는 국립중앙박물관이며 18세기에 제작되었음. 가로 128.2cm, 세로 34cm) 이상 바다를 소재로 한 순한글 사행록인 죽천이공행적록의 기록을 통해 해양재난을 극복해나가는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죽천이공행적록은 해양역사와 문학, 민속, 인물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 의미 있는 해양자료라 하겠다. 앞으로 해양문화유산이자 융합콘텐츠로서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김희경/국립해양박물관 유물관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