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정 현황
국립해양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을 소개합니다.
- 죽천이공행적록 건(竹泉李公行蹟錄 乾) 『죽천이공행적록』은 1624년 인조(1623~1649)의 책봉을 위해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사행록이다. 1 624년 6월 20일부터 10월 13일까지 사행의 전반부가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중 7월 24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해로사행에 관한 내용이다. 사행은 정사 이덕형 외 부사 오숙(吳䎘, 1592~1634)과 서장관 홍인한(洪麟漢, 1586~1634) 삼사가 참여하였고, 이들은 여섯 척의 배와 사백여 명의 격군이 동원된 대규모 사행 선단을 이끌고 평안도 선사포에서 시작하여 중국 산동성 등주로 향하는 총 3,760리의 바닷길을 따라 항해하였다. 해로 사행은 명청 교체기인 1621년 후금이 요동반도를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의 선박기술과 항해술은 험난한 바다를 안전하게 항해할 만큼 발달되었거나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있지 않았다. 초창기 해로 사행에 참여한 1620년과 1621년, 사신 전원이 익사하거나 선박이 침몰하는 해양조난사고가 발생하였고 사절단에게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주청사 이덕형에게 있어서도 풍파가 몰아치는 바다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죽천이공행적록』 8월 15일의 기록을 보면 해상기후 악화로 위급했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역풍이 거세 선박이 파손되고 이에 놀라 경황없이 허둥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단을 이끈 이덕형과 오숙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하늘과 무서운 바다에 안전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해로 사행의 험난한 난관과 위기를 극복하는 최고의 대처방안이라 판단하였따. 군관과 노졸들이 각자의 옷을 벗어 부서진 곳을 메우는 일이 전부였으니 그 참담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회오리바람이 급히 일어나 산 같은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배가 물결에 휩쓸려 백 척 물결에 올라갔다가 다시 만 길 못에 떨어지니 어찌할 방책이 없어 하늘에 축원할 뿐이라. 밤이 깊은 후 바람의 기세 더욱 심하여 배 무수히 출몰함에 지탱하지 못하네. 부사가 탄 배에 가장 험한 곳에 정박해서 배 밑 널빤지가 부러져 바닷물이 솟아 역류하여 배 안으로 들어오니 사람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부사가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뱃머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을 지어서 깨끗한 비단에 싸 바다에 넣고는 군과과 노졸로 하여금 옷을 벗어 틈을 막고 또 막게 하더라. 선물할 방물을 배 위로 옮기고 물을 퍼낸 후 바람이 점점 그치니 다행히 살길을 얻어 날이 밝기를 기다려 배를 옮겨 뭍에 닿게 하니 모든 뱃사람이 먼저 내려 장막을 치고 평안히 쉬면서 서로 위로하네.” 한편 같은 날 이덕형이 지은 시를 보면 풍랑으로 사납게 변한 바다에서 선박이 부서지고 중국 선박이 침몰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긴급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만사는 모든 사람 뒤에 하려 하니 배가 가는 것 또한 저절로 느리구나 평생 의리와 천명을 편안히 여기나니 저 하늘이 알아줄 것을 믿노라.” 해로 사행은 바람과 조류의 영향에 따라 다르지만, 순항일 경우 대체로 열흘 정도 가 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한 달 남짓의 일정이 걸린 1624년에는 3배가 넘게 소요되었다. 해상기후가 좋지 못해 바닷길 노정에 신중을 기했던 사절단의 노고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또 해로 사행 중 총 17차례의 제사를 올렸던 것도 해상안 전을 위한 나름의 대응책이었을 것이다. 한국 / 조선중기 / 종이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9호
- 조선통신사 시고(朝鮮通信使 詩稿) 1811년(순조 11)에 통신사의 사자관寫字官으로 일본에 간 동강 東岡 피정종皮宗鼎이 쓴 오언시이다. 사자관은 각종 문서나 문헌을 정사精寫하는 일을 맡은 중앙관원이었다. 내용은 남쪽에서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을 소재로 하였다. 왼편에 ‘조선동강朝鮮東岡’이 부기된 것으로 봐서 일본에 선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 조선(1811년) / 종이 /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 조선통신사 봉별시고(朝鮮通信使 奉別詩稿) 1811년(순조 11) 통신사 일행을 송별하면서 일본인들이 지은 시이다. 신미년 통신사는 윤3월 12일에 동래에서 출항하여 29일에 대마도 부중府中에 도착하였고, 7월 3일에 부산으로 돌아왔다. 앞의 1수 봉별도호이군(奉別都護李君)은 통신사 영접을 위해 파견된 당시 일본 최고의 유학자 마츠자키 고도(松崎慊堂)가 통신부사 이면구(李勉求)에게 지어준 칠언배율(七言排律)의 송별시이다. 이면구의 인품과 글씨에 대한 칭송과 이별 후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뒤의 8수 공부단율팔장요봉기(恭賦短律八章遙奉寄)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지어졌는데, 동래 발항 전인 3월 15일에 지은 것으로 보아 일본인 우에키 아키라(植木晃)가 조선 통신사를 송별하면서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행으로 일본에 성대한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칭송과 양국의 우호에 대한 바람 등이 담겨져 있다. 일본 / 에도(1811년) / 종이 /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 조선통신사 수창시(朝鮮通信使 酬唱詩) ‘수창酬唱’은 시가詩歌를 주고 받으며 부른다는 의미이다. 이 자료는 1682년 8월 29 일에 일본인 야마다 겐킨(山田原欽)이 조선의 통신사 일행과 수창한 시를 필사한 것이다.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제술관 성완(成琬)과 이담령(李聃齡), 홍세태(洪世泰) 등이 일본인 야마다 겐킨과 주고받은 시를 모은 두루마리 형태의 자료이다. ‘조선의 시인이 신선이 타는 배와 말을 타고 와서 일본 도처에 새로운 흥취를 일으킨다仙査 驛馬載詩人 到處定知發興新.’라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 문인들에게 통신사와의 문학 교류는 여러 면에서 매우 흥미롭고 의미있는 기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신사의 조·일 문학 교류는 하나의 전통으로 정착되었으며, ‘사행 문학’이라는 문학 의 한 범주를 형성하였다. 한국, 일본 / 조선(1683년) / 종이 /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
- 조행일록(漕行日錄) 『조행일록漕行日錄』은 1863년에 전라도의 세곡稅穀을 운반하였던 과정을 기록한 일기다. 책임자는 함열현감咸悅縣監이자 성당창팔읍조세영운관聖堂倉八邑漕稅領運官이 었던 임교진(林喬鎭)이었다. 1862년 11월부터 세금을 거두기 시작하여 다음해 3월 15일 성당창을 출발하였고, 5월 2일에 한양의 서강西江에 도착하였다. 일기에는 이 일정을 중심으로 임교진이 부임한 뒤 세곡을 모으는 과정과 서울에 도착한 뒤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등 여러 관청에 세금을 납부하는 일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에서 거두어들인 곡물은 관리의 녹봉祿俸과 군인들의 급료를 비롯한 재정의 바탕이 되었기에,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은 국가의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임교진(1803~1865)은 본관이 나주이고, 자는 백신(伯臣)으로 헌종 3년1837에 진 사進士에 급제하였다. 1862년 5월 29일에 함열현감에 임명되면서 성당창의 세곡을 운반하는 역할도 함께 맡았다. 조운을 마친 뒤 1864년 6월에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임명되었으나 1년 만에 죽었고, 조정에서는 효자의 정려旌閭를 내려주었다. 성당창에 세곡을 모았던 전라도의 군현郡縣은 남원南原·진산珍山·익산益山·금산 錦山·고산高山·운봉雲峰·용담龍潭·함열咸悅로 모두 8개였다. 성당창은 함열현의 관아 가 있던 곳에서 동북東北쪽으로 2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여기에 창고를 갖추고 각 군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모았는데, 약 5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세곡을 운반한 조운선은 12척을 마련하였는데, 1척은 새로 만들었고 2척은 임대하여 충당하였다. 임교진이 탔던 상선上船, 第一醎字船을 비롯하여 각각의 배에는 평균 1,160 석의 쌀과 콩을 실었다. 세곡을 운반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성당창을 출발하여 본격적인 조운 이 시작되었던 웅포熊浦까지 가는 길은 물이 얕은 곳이 많아 7~8일이 걸렸다. 4월 6일 에는 배 1척이 암초에 걸려 세곡을 잃을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런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경험이 많은 사공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운항하였다. 또한 거쳐가는 군현에서 수로를 잘아는 사람들을 호송리護送吏로 보내 조운선을 인도하고 과거장過去狀을 받아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상세하게 적은 『조행일록』은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을 담고 있다. 조운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 『조행일록』 보다 12년 뒤에 작성된 『을해조행록乙亥 漕行錄』이 있다. 이 일기는 1875년에 조희백(趙熙百: 1825~1900)이 작성하였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일기와 비교하면 『조행일록』은 한양에 도착한 후 조세를 납부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된 점이 크게 다르다. 세곡의 납부를 위한 행정 처리 과정과 운반된 곡물의 상태와 수량을 확인하는 일, 사공들의 향후 업무를 추첨하는 일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행일록은 필사본으로 서두에 해당하는 기록이 중복되어 있는데, 이것을 모두 엮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일기의 특성상 조운 과정에서 매일매일 기록한 원본의 일기가 있었을 것이며, 이것을 다시 옮겨 적은 책이 현재의 조행일록이다. 맨 앞의 행초서行草書로 기록한 첫면은 다른 부분과 서체가 다르며, 본문의 중간중간에 교정 한 서체는 같은 글씨로 보인다. 따라서 이 일기는 임교진이 정서를 시작했다가 다른 사람에게 필사를 맡기고, 그것을 교정하여 완성한 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운을 마치고 함열로 돌아간 이후의 시간부터 그가 죽기전까지, 즉 1863~1865년 사이에 필사된 일기로 볼 수 있다. 임교진의 『조행일록』은 조선시대의 조운 행정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가치가 높다. 조운 도중에 있었던 사고를 증명하기 위해서 임교진에게 필요한 기록 이었으며, 후일 같은 조운 업무를 담당한 관리를 위한 참고자료로도 훌륭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국 / 1863년 / 종이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