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지정 현황
국립해양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을 소개합니다.
- 나전 대모 쌍룡문 함(螺鈿玳瑁雙龍文函) 함의 윗면에 대모로 장식한 쌍룡이 있고, 이 장식은 다른 면까지 연결되게 배치하였다. 비늘과 갈기, 배부분은 어피로 장식하고, 구름은 나전으로 장식하였으며, 뚜껑 하부 가장 자리는 어피로 장식한 뒤 옻칠로 마무리하였다. 또한 함 내부에는 쌍룡 문양의 감색 비단을 전면에 붙였다. 옷이나 물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나전과 대모를 혼용하여 전면을 꾸미되 견고함을 더한 이 자료는 궁중이나 상류층이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 조선 19세기 / 금속, 나무, 자개, 대모, 어피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21호
- 백자 철화 운룡문 호(白磁鐵畵雲龍文壺) 백토로 상, 하의 몸체를 따로 만든 후 접합한 철화백자항아리로 산화철 안료인 석간주(石間硃)로 그림을 그려 장식했다.문양은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이 조합된 운룡문으로, 용의 얼굴은 엄격한 도상에서 벗어나 눈과 더듬이 형태의 갈기만 남았고 몸통은 다리와 발톱을 생략하여 그렸다.용의 비늘은 부채꼴 모양의 비늘 구획을 나누지 않고 붓칠로 듬성듬성 자유롭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며, 과감하게 생략된 운룡문은 빠르고 거친 필치로 대범하게 표현되었다.또한 구연 상단 돌출부를 따라 23개의 철화퇴점(鐵畵堆點)이 찍혀 있다. 한국 / 조선 17세기 후반 ~ 18세기 전반 / 도자기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9호
- 감로도(甘露圖) 감로도는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영가천도靈駕薦度 의식을 그린 불화이다. 이 감로도는 좌우를 가르는 담벼락을 중심으로 2단으로 구획되며, 하단에는 화탕지옥火湯地獄, 거해지옥鋸骸地獄, 도산지옥刀山地獄 등 시왕十王이 죽은 자를 심판하여벌을 받는 지옥도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화폭의 최상단에는 다섯 여래가 지옥 중생을 맞이하기 위해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으며, 그 아래로 여섯 보살이 정렬해 있다. 거울을 지나 성문을 들어서면 망자를 위로하는 주악대가 있고,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이 이끄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 서방정토는 푸른 기와로 장식된 전각들로 표현되어 있다. 한국 / 20세기 / 종이 / 부산광역시 등록문화재 제2호
- 옥포-6000 심해 6,000m급 국내 최초의 자율무인잠수정(AUV; Autonomous underwater vehicle)이다. 데이터를 무선으로 송, 수신하며 수중에서 자율적으로 항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5000m 심해의 해양 자원 연구를 위해 국내에서 자율무인잠수정을 활용한 첫 사례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 / 1996년 / 금속 / 기증 / 제 산업기술-12(2022)호
- 백의관음보살도 소형의 백의관음보살도로 사례가 드물다. 필선의 섬세함은 부족하나 불화를 그린 화승명, 봉영(琫榮)과 1920년이라는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대기 불화이다. 한국(일제강점) / 1920년 경 / 종이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8호
-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 관음보살은 자비로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불교의 보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관세음보살로 신앙해 왔으며 관음보살이라 약칭하였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보타락가산(補陀落遊山)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보타락가산은 팔각형의 산으로, 산에서 자라는 꽃과 흐르는 물은 빛과 향기를 낸다고 한다. 박물관 소장 "관음보살도"는 보타락가산 정토에 앉아 있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그린 것이다. 그림은 비단 비탕에 혹색을 칠한 후 고 위에 금선(金線)으로 그린 선묘불화(線描佛畵)이다. 규모는 세로 59.5cm, 가로 48.2cm 크기의 소형 불화이며, 비단 3매(3.4, 39.8, 5.1cm)를 횡으로 잇대어 화폭을 형성하였다. 화면에는 대원광(大圓光)을 그리고, 그 원 안에 관음을 비롯 도상을 배치하였다. 중앙에 크게 그려진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을 갖추고 정면을 향해 해수면 위로 솟은 암좌에 유희좌로 앉아 있다. 오른손은 바닥을 짚고, 왼손은 무릎 위에 걸치고 있다. 관음은 보관 위로 투명한 백의를 걸쳤는데, 양 어깨를 감싸고 발아래로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기슴과 무릎 아래에는 화려한 영락과 띠 장식이 보인다. 관음보살이 앉아 있는 평평한 암좌의 왼쪽에는 선재동자가, 맞은 편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합장한 모습으로 었다. 선재동자는 도교식 복장을 착용한 모습으로 관음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두 손을 합장하였고, 푸른 쌍계머리에 맨발을 드러내고 있다. 어깨에 두른 천의자락은 겨드랑이를 지나 뒤쪽으로 흩날리고 었으며, 바지는 흘러내려 엉덩이가 드러나는 익살스러운 모습이다. 맞은편의 해상용왕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어깨에 천의를 두른 채 허리를 약간 구부리며 합장 배례하는 모습이다. 관음보살의 오른쪽 뒤편의 암좌 위에는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이 놓여 있고, 천공에는 청조가 날고 있다. 관음의 왼쪽의 배경에는 대나무와 괴석이 그려져 있다. 조선후기의 현존 관음보살도는 18~19세기의 사례가 많으나 대부분 독립된 전각 관음전의 후불탱으로 제작된 채색화이다. 그 중 커다란 원(圓)을 그려 그 안에 도상을 배치하거나 거대한 반원형의 원을 배경으로 장엄한 유형은 유독 19세기에 선호되었다. 박물관 소장 "관음보살도"는 흑색 바탕에 금색선으로 그린 선묘불화로, 필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성시기는 대원광(大圓光) 안에 관음 도상을 배치하였고, 구불거리는 옷자락과 정병의 기형, 대나무와 괴석, 선재동자와 용왕 도상의 제반 특징을 통해 19세기로 추정된다. 본 작품처럼 규모가 작은 관음보살도는 개인의 원불(願佛) 성격이 강해 조선후기 관음보살도의 다양한 신앙적 기능과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로 판단된다. 조선 / 19세기 / 비단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20호
-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 박주부 초상 서문의 내용을 원문, 해석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박주부 초상(朴主簿 肖像) 서문의 내용 余於癸巳秋奉命于朝來寓對州賓館矣. 有日本人以畵像簇子示之筆法淋離生氣滿紙. 問是誰人之像歟, 曰曾於草梁 訓噵家逢着醫士朴主簿, 累日受業多有所進師弟之情, 寤寐未忘而更難於親煮 故畵其生像.朝暮獻酌云, 余聞之嗟嘆曰 世間豈有如此至誠之人哉. 朴主簿卽姪 子偉甫也. 問其名仁位氏朝隣云. 余敬其○感其誠書請簇面以記之 冬旬二朴同知道卿爲仁位氏情以識不忘 나는 계사년 가을에 조정의 명을 받들어 대마도 빈관에 와 머무르고 있었다. 어떤 일본인이 초상이 그려진 족자를 보여주었는데 필법이 힘차고화폭에 생기가 가득했다. 이것은 누구의 상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일찍이 초량(부산)의 훈도의 집에서 의사 박주부를 만나 여러 날 동안 수업을 받아 사제의 정으로 나아가게 된 바가 많았는데, 그리워 잊을 수가 없었으나 다시 친해지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그 살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다고 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탄복하며 말하기를 세상에 어찌 이같이 지성한 사람이 있을까 하였다. 박주부는 곧 조카인 위보이다.그의 이름을 물으니 인위 조린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에 삼가하고 정성에 감동하였는데족자에 글을 청해옴으로 이를 기록한다. 겨울2월동지사 박도경이 인위씨의 정을 기록함으로써 잊지 않게 한다. 족자 형식에 일본 종이를 사용한 이 그림에는 한 인물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위에는 장문의 글이 적혀 있다.장방형의 화면이 글과 인물 묘사 공간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져 있는 형식은 조선의 그림에서 찾기 쉽지 않다. 이런 형식 은 일본 회화에서 확인이 된다.이렇듯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화면 속의 글과 화풍에서도 확인이 된다.화면 위쪽에 있는 글은 자字가 도경道卿인 박재창(朴再昌, 1649~1720 년 이후)의 제사題辭이다. 이 제사와 끝에 찍힌 인장은 그림에 담긴 사연을 말해주며, 시기 등에 대한 단서를 품고 있다.그는 1713년에 예조에서 대마도 를 지배하는 다이묘大名에게 보내는 사절단, 즉 문위행問慰行의 일본어 통역관 수장堂上譯官으로 참여하였다.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1713년癸巳에 조정의 명으로 대마도에 건너간 박재창은 인위 조린(仁位 朝隣)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이 일본인이 초상화 한 폭을 보여주자 그는 그림에 담긴 사연을 물었다.인위 조린은 자신이 부산의 초량에 왔을 때, 종6품 주부主簿이며 성이 박씨고 자호가 위보(偉甫)인 조선인에게 학업을 익혀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나 헤어지게 된 뒤에는 그를 잊지 못하여 초상화를 제작하고 아침저녁으로 술잔을 올렸다고 하였다. 박주부의 숙부였던 박재창은 사연을 들은 후 세상에 어찌 이렇게 지성한 사람이 있을까 감탄하고 초상화에 글을 적었던 것이다.아마도 인위 조린은 대마도에 온 박재창이 박주부의 숙부라는 소식을 듣고 초상화의 제사를 받고자 방문한 것 같다. 이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은 부산의 의원 박주 부가 된다.인위 조린이 박주부에게 무엇을 배웠는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박주부가 의원이었으므로 의학 지식이었을 것이다. 박재창과 자호가 위보인 박주부, 그리고 인위 조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인위 조린은 대마도에 거주하는 인물이라는 점 외에는 확인이 어려우나 두 조선인은 대강 알 수 있다. 찬문 말미에는 본적 등을 담은 도장貫籍世家印인 ‘무안후인務安後人’이 날인되어 있다.그러므로 제사자와 그림 속 주인공의 본관은 무안박씨務安朴氏가 된다.이들은 전형적인 중인 가문의 일원으로, 박재창은 물론 그의 증조부부터 자식 항렬까지 왜어 역관이 다수 배출되었 으며 의관 등도 나왔다.이들을 비롯한 무안박씨 일족은 주로 왜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인위 조린이 박주부를 만나 학업을 배운 초량은 바로 왜관이 있던 곳이다.이 초상화의 제작지는 복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인물은 흉배胸背가 달린 관복과 비슷한 옷을 입고 품대品帶를 차고 있어서 마치 조선이나 명明의 관복 官服을 연상시킨다.그리고 품계를 나타내는 흉배의 공작 같은 문양이나 종6품 주부가 찰 수 없는 금대金帶와 그 속의 문양은 법식에 너무나 어긋나 있어서 정확한 이해를 갖고 그린 것이 아니라 형식만을 기억하거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린 것 같다.이는 앞서 설명한 재질 및 형식과 아울러 초상 화가 일본에서 그려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조선에서 그려졌거나 인위 조린이 조선 화가에게 부탁했다면 이렇게 제멋대로 흉배와 품대를 표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아쉽게도 인위 조린이 (박주부 초상)을 그렸는가는 확인되지 않아 확증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 그림은 당시 일본 내의 화단의 주요 유파이며 어용화사로 활동한 카노파狩野派 화풍과 관련이 있다.오른쪽 으로 꽤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는 보통 정면에서 약간 비스듬한 자세八分를 표현한 조선 초상화나 정면을 향한 중국의 경우와도 다르다. 그리고 통통한 박주부의 모습은 실제 모습을 표현한 듯이 생기가 돈다.인물의 외곽선은 일반적인 인물화의 묘법描法을 사용하여 굵기의 변화와 끊김이 자유 롭다. 이러한 모습과 기법은 마치 카노 츠네노부(狩野常信, 1636~1713)가 1711 년에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태억초상趙泰億肖像)을 연상시킨다.박주부에 대한 인위 조린의 존경과 사모의 마음은 그림 속에 드러난다. 복식 은 정복正服에 해당하는 관복 형태이나 당초문 같은 문양이 들어가 있어서 마치 도교 선인이 입는 포를 연상시키며원형이고 금으로 그려져 있는 옷의 문양과 그 위치 중에는 양 어깨에 있는 것도 있어서 왕의 보補같기도 하다. 또한 신발은 성현이나 신선의 인물 모습에 자주 등장하는 방리方履와 비슷하다. 이렇게 실재하는 동시대 인물의 모습을 그릴 때, 성현과 신선의 의관衣冠을 입히는 경우는 해당 인물을 존숭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조선에는 초상화법이 엄격한 탓에 18세기 후반부터 조금씩 나타나지만 일본에서는 꽤 일찍부터 보인다. 한편 인물이 쓴 모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에 보이듯이 의원이 평상복에 쓰는 것과 유사하여 주인공의 직책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 그러나 ‘수복壽福’이 써져 있는 경우는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데, 의관이라는 직업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으나 박주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바람의 표현 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위 조린은 스승 박주부를 성현처럼 오랫동안 모시 고 싶었던 것 같다. 1713년 이전에 그려진 (박주부 초상)은 18세기 초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맺은 사제의 정을 표현한 한일교류의 상징물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의술로 맺어진 인연을 나타낸 최초의 작품이기에 의의가 더욱 높으며, 조선의 의사를 표현한 가장 앞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 조선(18세기 초) / 종이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3호
- 한글조선전도(한글朝鮮全圖) 현재까지 알려진 한글 지도 중에 가장 이른 시기의 지도로 추정된다. 안음의 지명이 18세기 안의로 바뀌기 전에 제작된 것으로 지도의 연대는 18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지도를 살펴보면 산은 삼각형 형태의 크고 작음에 따라 높이와 산맥을 짐작케 하고 있으며, 물길을 따라 지명과 서,남,동해의 주요 섬 및 포구가 기록되어 있다.육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모든 물길을 내륙 깊숙하게 그려 물길에 따른 이동을 강조하고 있다.지도 뒷면에는 경오년 신수라고 하여, 경오년의 점괘를 메모하였는데, 경오년은 1750, 1810, 1870, 1930년이다. 지도 뒷면에 썼으므로 지도가 나온 시기는 경오년보다는 이른 시기이다. 미국의 유명한 한국학 학자인 게리 레드야드(Gari Keith Ledyard)가 논문으로 소개하면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해안 지역의 지명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또한 울릉도, 우산도, 제주도 등 우리나라 섬 지역과 함께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다. 한국 / 18세기 / 종이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0호
- 이원찬 필 호도(李元粲 筆 虎圖) 이원찬(李元粲) 필 (호도虎圖)는 조선시대 화가로 알려진 이원찬의 작품으로, 종이에 수묵채색으로 그려진 족자형태의 그림이다.원산과 근경의 암벽을 배경으로 절벽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포효하는 모습이다. 화면 하단에는 양각방인의 자호인과 음각방인의 ‘李元粲’성명인이 관서되어 있다. 이원찬은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나, 일본의『고화비고古畫備考』五十卷「조선서화전朝鮮書畵傳」기록에서 그 뛰어난 필력이 확인되는 인물이다.현재 알려진 이원찬의 작품 세 점은 모두 호랑이 그림인데, 특히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호도)는 원산의 사선 표현, 암벽사이의 나뭇잎과 폭포 등의 채색표현 등으로 미루어 일본화풍의 영향이 감지되고 있다. 현재 이원찬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은 오사카역사박물관 소장 (호도)와 독일 베를린 국립 아시아미술관 소장 (호도) 2점이 있다. 오사카역사박물관 소장 (호도)는 신기수 컬렉션의 하나로, 배경은 비워둔 채 몸을 웅크리고 돌아보는 호랑이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독일 베를린 국립아시아미술관 소장 작품도 배경없이 거의 유사한 구도의 작품이다.이들 작품에서 확인되는 이원찬 호랑이의 특징은 동그랗고 큰 눈, 벌레모양의 작은 눈동자, 살찐 누에 같은 눈썹, 3자 모양의 윗입술, 검은 꼬리 끝과 검은 점이 박힌 하얀 원의 묘사 등이다.현재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호도) 작품에 관서된 인장과 오사카역사박물관 소장 (호도)의 인장이 동일하며, 호랑이묘사의 특징 및 세밀하고 유려한 필치 또한 일맥상통한다. 이원찬의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고 국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나, 작품의 구도나 표현에서 일본취향이 감지될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회화를 중심으로 수집해왔던 신기수의 컬렉션에 또 다른 이원찬의 작품이 포함된 점 등을 미루어 조선통신사관련 작품일 개연성이 높아, 이 작품은 향후 한일교류작가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 / 17세기 / 종이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