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칼럼 marine column 대항해시대와 동아시아 1498년 5월 20일 바스코 다 가마가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캘리컷(cALICUT)항으로 입항하엿다.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겨유한 뒤, 동북쪽으로 계속 올라오다가 케냐 말린디에서 인도양을 횡단하여 마침내 향료의 나라 인도에 도착한 것이다.
1498년 5월 20일 바스코 다 가마가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캘리컷(Calicut) 항으로 입항하였다. 리스본을 떠나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경유한 뒤, 동북쪽으로 계속 올라오다가 케냐 말린디에서 인도양을 횡단하여 마침내 향료의 나라 인도에 도착한 것이었다. 귀국길에는 몬순의 영향으로 항해가 지체되면서 선원들 가운데 반이 넘게 괴혈병으로 쓰러졌지만, 동방무역의 이익은 30%가 넘는 포르투갈의 남성들을 해외로 유혹했다. 포르투갈은 후추, 생강, 계피, 육두구 등 향신료 교역과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의 실크와 은 무역을 중계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16세기말 포르투갈은 리스본에서 나가사키 사이에 40여개의 상관과 요새를 거느리게 되었다.
1492년 10월 에스파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가 바하마군도의 산살바도르에 도착했다. 서인도제도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경략에 나선 에스파냐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 즉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에게 빼앗겼던 실지회복전쟁의 경험을 재연하듯, 무서운 기세로 정복과 약탈을 자행했다. 1521년 코르테스는 아즈텍을 멸망시켰고, 10년 후인 1531년에는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무참히 정복했다. 갤리온 전함의 호송을 받는 상선에는 수많은 금과 은이 실려 고국으로 운송되었다. 플렌테이션 농장에서 강제노역을 통해서 생산한 육류와 가죽, 수지, 설탕, 인디고, 코치닐 등도 함께 유럽으로 송출되었다.
마젤란이 태평양을 횡단한지 44년 후인 1565년,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출발한 500여명의 에스파냐 병사들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에 도착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1년 전인 1571년에는 마닐라에 스페인령 동인도의 수도가 건립되었다.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의 태평양에서도 갤리온 무역이 시작되었고, 푸젠상인들은 실크와 도자기 등 매력적인 중국 상품들을 잔뜩 싣고 마닐라로 몰려왔다. 아시아와 신대륙 사이에도 대륙간 교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5세기 중엽 대항해의 시대가 개막된 지 100여년 만에 마침내 세계가 하나의 교역 네트워크로 연결된 것이다. 과거 베니스상인, 페르시아상인, 아라비아상인, 구저라트상인 그리고 푸젠상인들에 의해 점점이 이어지던 역내 교역루트들이 하나, 둘씩 묶여지더니 마침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 의해 완전한 실선으로 연결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나침반 아이콘
대항해시대의 시위를 당긴 것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면, 17세기 들어 해상교역을 통해 새로운 근대체제로 견인한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이들은 앞의 두 나라와는 달리, 경제적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군사적인 폭력 외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제도와 체제를 구축했다. 그들은 국왕의 권위에 매달리기 보다는, ‘동인도회사’에 교역독점권과 국가에 준하는 권리를 부여해주고, 현지 상황에 따라 빠르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 주식을 발행하였고 정기적인 배당제도를 확립하였는데, 이로써 근대적인 주식회사 제도가 탄생하였다. 세계교역을 주도하면서 네덜란드 길더 화(貨)가 세계화폐로 자리 잡았고 영국의 파운드가 뒤를 이어 기축통화(Key currency)가 되었다.
인도산 캘리코(Calico) 순면과 코치닐, 인디고 등 염료는 유럽인들의 복장을 가벼우면서도 울긋불긋하게 진화시켰고, 중국산 도자기와 차는 유럽인들의 식사와 여가문화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싸고 가벼운 캘리코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영국의 모직, 견직, 리넨 산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직공들은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었다. 결국 위기가 새로운 변화를 촉발했으니, 산업혁명이 발생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새로운 변화 속에서, 해상 기동력과 전투력을 이용하여 항구에 요새와 상관을 만들어 아시아 교역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던 방식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유럽세력들은 점차 침투범위를 내륙으로 확대하였고, 동인도회사 대신에 정부가 직접 나서서 식민지를 운영하였다.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가 각각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등지에서 제국주의 식민 지배체제를 확립해갔다.
바스코 다 가마가 리스본에서 인도 캘리컷까지 15,000마일의 장거리 항해에 성공하기 90년 전인 1406년, 명나라의 정화(鄭和) 함대가 비슷한 거리를 항행하여 캘리컷 항에 입항한 바 있다. 정화의 대항해는 27년간 일곱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매 번 60여척의 거함과 27,000명이 넘는 대인원이 동원된 전대미문의 대원정이었다. 함대의 분견대는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 아프리카 동안의 말린디와 몸바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전근대시기에 동아시아가 주도한 대항해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건국과 동시에 바다를 통한 교역을 금지하는 해금령을 선포하였고, 조선과 일본도 ‘해금시대’로 접어들었다. 물론 국가마다 차이는 있었다. 명청제국(明淸帝國)은 ‘제국의 상점’ 광저우(廣州)를 통상항으로 개방하였고, 그곳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등의 상관이 건립되었다. 에도막부는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다가 기독교 포교문제로 결별하였지만, 나가사키를 네덜란드와 중국 상인들에게 개방하였다. 이 도시는 일본 ‘개화의 창’이 되었다.
조선은 시종일관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고수했다. 덩저우(登州)·양저우(揚州)에서 청해진을 거쳐 일본 다쟈이후(大宰府)까지 동북아 해상을 주름잡던 신라상단의 진취성과 벽란도를 개방하여 아라비아와 푸젠상인들을 유치했던 고려의 개방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대항해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폐쇄적인 동아시아는 팽창하는 유럽에 밀리기 시작했으며, 유럽은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부상했다. 보수적인 대외정책을 고수한 조선은 세계네트워크가 만들어지던 새로운 시대에 고립되고 말았다.
